우리 시리즈의 1권에서 나는 마르크스의 방법을 '역설의 변증법'이라고 명명한 적이 있는데요(「다시 자본을 읽자, 136~139쪽). 역설은 하나의 의미에 대해 다른 의미, 심지어 반대의 의미가 동시에 생겨날 때, 혹은 한쪽 방향을 강화하는 일 동시에 다른 쪽 방향을 강화하는 일이 될 때 성립합니다. 마르크스는 사물이 품고 있는 다른 의미를 정말 잘 읽어냅니다. 특정한 배치 속에서 사물은 특정한 의미와 용법을 갖지만, 마르크스는 그 사물이 그것과는 다른 의미와 용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읽어냅니다. 막연하게 '다른 의미와 용법이 있을 수 있어'라는 식의 말이 아닙니다. 해당 배치 속에서 그것이 작동되는 방식을 보고 하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인터넷은 처음에 군사적 목적에서 개발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작동되는 방식을 보고, 그것이 품고 있는 다른 의미와 용법, 그러니까 배치만 조금 바꾸면 현실화될 수 있는 잠재적 의미와 용법을 읽어내는거죠.
사물에 대해서만이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배치 자체에 대해서도 그것이 품고 있는 해체 가능성을 읽어냅니다. 특정 사회형태의 원리에서 그것의 잠재적 해체 원리를 읽어낸다고 할까요. 이를테면 정복전쟁은 고대 로마를 키워나간 원리지 만 동시에 붕괴시키는 원리가 됩니다. 매듭이 묶이는 방식과 풀리는 방식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지요.
이는 모든 사물, 모든 현상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어진 것'에 대해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고루 나열하는게 비평이 아닙니다. 적어도 마르크스의 비평(비판)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는 주어진 것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읽고 그 길을 찾는 사람입니다. 현재의 지형과 바람과 습기를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미래로 가는 출구를 찾기 위해, 달리 말하면 현재 속에 들어온 미래의 흔적을 읽어내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 습니다. 이것이 투사로서 비평가가 해야 할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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